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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제가 한국에서 섬겼던 동안교회에서 며칠전 새벽예배때 이상억 목사님이 전해주신 말씀입니다.
녹취한 설교내용 전체를 복사해왔습니다.
내용이 너무 길기 때문에 시간 되실때 천천히 한번 읽어보세요.

이 설교말씀은 너무도 감동적이고 잔잔하게 시인의 마음을 예화로 들어 참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계십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에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주신 자유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살아갈 것을 주문하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 나를 구속(救贖)하신 그 구원의 자유를 누리기 보다, 다시 율법적으로 돌아가는 그런 모습이 내게 있습니다.

나 스스로 의로워 지지 못한다는 자책이 도를 넘어 십자가 복음을 망각하며 나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행위로 빠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하여 죽어가는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성령님은 구원받은 자에게 하나님이 자유함을 주셨음을 다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상억 목사님의 자유를 누리라는 말씀에 너무나 감동적인 은혜를 받았습니다. 너무도 감동적이고 잔잔하게 시인의 마음을 예화로 들어 참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는 다 각각 다르겠지만 필요하신 분은 한번 들어보시거나

http://www.dongan.org/remember/board.asp?boardId=specialsermon&read_type=read&b_no=117297&int_ref=117297&page=1&startpage=1&cate=int_ref&order=desc

읽어보시고 묵상하시면서, 2월 한달은 참 자유를 누리시면서 예수님 사랑에 푹 빠져보기를 소망합니다.


이상억 목사 : 장신대 신대원 졸업. 프리스턴 대학교 졸업.
                   장신대 목회 상담학 교수. 학생 생활 목회상담소 교수.

             예배하는 자의 자세

     본문     누가복음 18:10-1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이 말을 학교에서 참 많이 하고 다닙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참 이른 아침에 나오셔서 찬양 연습하시느냐고 힘드셨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조금 전에 우리 담임목사님께서 2월 한 달의 주제를 자유라고 이야기 하셨는데 오늘 함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다지 자유처럼 여겨지지 않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예배자의 태도에서 자유를 발견해봅니다.
“자유는 이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거기에 두 사림이 있다고요.
첫 번째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가 얼마나 위대한 위인인지 혹은 의인인지 그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사람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 바리새인에 대하여 이야기 하셨는데 바리새인은 이렇게 이야기 하더랍니다. 성전에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에 서서 어떻게 이야기 했는가 하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구제하고 봉사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가리켜 지목하며 자기의 의인됨을 이야기 하였다라고 얘기합니다. “나는 저 세리처럼 불의 토색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세리입니다. 세리라는 사람은 성전 저 귀퉁이에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를 수도 없었습니다. 머리를 조아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스스로를 바라봤습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던 겁니다. 자기의 삶에 여러 가지 과정들을 생각하며 스스로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나약한 모습가운데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던지,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스스로를 감히 의롭다 이야기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저는 이 모습이 중요하다 라고 여기는 사람 가운데 하나 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세리가 더 의롭다 라고 이야기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의롭다라고 칭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를 향해서 의롭다 라고 이야기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스스로가 의롭다, 의롭다, 스스로가 아무리 그렇게 외치고 주장한다 하여도 그것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만 그렇게 이야기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신학적으로 칭의(稱義)라는 말을 씁니다. 의롭다고 불러주셨다 라는 말입니다. 전혀 의롭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삶의 면면을 바라보면, 물론 의로운 구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의롭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구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엇입니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이라 함은 ‘연약하다’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완전하고자 하나, 아무리 온전하고자 하나, 아무리 이 땅에서 양심을 세우고자 하나, 우리는 그것을 달성할 길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죄악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나, 아무리 불의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나, 그러나 불의에 한 가운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죄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아무리 내 자신이 불의로부터, 악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나, 하나님 그럴 수가 없는 존재가 바로 저입니다.” 라고 고백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야기하시는가 하면 “의롭다” 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의롭다”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은총이 되어지는 겁니다. 은혜가 되어지는 겁니다. “하나님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죄인에 불과한 저를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의롭다 인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는 이 모습이 자유의 모습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자유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닐는지 요.

라인홀 리버 라고 하는 신학자가 그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셔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그렇게 기도하더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모든 죄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주옵소서. 나로 하여금 눈보다 더 희게 하시고 양털보다 더 희게 하시고, 흰 눈보다 더 희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들의 간절한 마음과 애틋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러나 조심하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사악한 기도 가운데 하나를 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고요. 왜냐고요, 이세상에 모든 죄악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안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눈보다 더 희어지고 양털보다 더 희어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시는데 스스로가 그 하나님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역시 어떻게 이야기하였는가 하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자기의 죄악 됨을 고백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스스로의 죄성을 고백해야 된다고 말입니다.
퀴리에 엘레이숀은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내게 자비를 내려주옵소서,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내가 아무리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나 아무리 의인답게 기독 인답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나 나는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걸 고백하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저는 이 고백이 중요하다 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왜요, 이 고백은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상태를 느끼고 누리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 앞에 서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니 자연스럽게 나의 죄악 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스스로를 누리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우리의 죄성을 고백하는 그 누림에 있습니다. 누림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세리에 모습은 일견 바라보기에는 패배자의 모습입니다.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세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의롭다라고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이 “의롭다”라고 이야기하셨던 그 모습, 그 모습은 일종의 세리의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깊이 있게 느끼는 바로 그 누림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 누림의 순간에서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조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순간이 당당하다니요?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떳떳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떳떳함과 당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 죄인입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스스로를 “‘죽었다’ 여겨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존재를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는 구나!” 라고 느끼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순간이 당당함의 순간입니다. 기독교인의 당당함은 자로 이 순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떳떳함은 바로 이 고백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떳떳함이라고 하는 것, 이 당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인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누림”이라고 하는 단어를 두 가지 말씀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말씀은 구약에 있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로 2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징 27절로 28절에 있는 말씀을 바라보면 여기에 소명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지이시고 어떻게 이야기하시는지 아십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이야기 하셨던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소명입니다. 충만하라는 겁니다. 이 땅을 정복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 말을 생각해왔는가 하면,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극복해야 한다”고요. “이겨내야” 된다고요. 내 안에 있는 죄악이라고 하는 것,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 어쩌면 삶의 연약함이라고 하는 것을 극복해내야 된다고, 그래서 밟아버려야 된다고, 이겨내야 된다고, 그것이 충만이라고, 그것이 다스리는 것이라고, 그것이 정복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들에게 조금 다른 말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몇 개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아침부터 시를 읽어드린다 하면 조금 이상하게 여겨지겠습니다만 한번 읽어드릴 테니 잘 들어보십시오.
정호승 시인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는 시집을 썼습니다.  이 시집에 보면 몇 개의 시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 “그리운 목소리”라는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혹시 나무를 껴안아 보신지 있으신지요. 지난 가을에 나무 한번 껴안아 보셨습니까? 어렸을 때 아이들이랑 숨바꼭질하거나 이럴 때, 나무 껴안아 본 것 말고요. 최근에 이미 다 장성하셔서 어른이신 여러분들이 지난 가을에, 가을을 한번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운 목소리
나무를 껴안고 가만히 기대어 보면
나무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행주치마 입은 채로 어느 날
어스름이 짙게 깔린 골목까지 나와
호승아 밥 먹으러 오너라 하고 소리치던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하! 나무를 껴안으면 엄마 목소리가 들린답니다. 시인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귀뚜라미가 울지요, ‘귀뚜라미가 그냥 우는 게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인은 귀뚜라미가 우는 게 마치 자기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귀뚜라미에게서 받은 짧은 편지”라는 시시를 썼습니다.

울지마!
엄마 돌아 가신지 언제인데
너처럼 많이 우는 애는 처음 봤다
해마다 가을 날 밤이 깊으면
갈대 잎 사이로 허옇게 보름달 뜨면
내가 대신 이렇게 울고 있잖아!

귀뚜라미가 엄마 돌아가신 자기에요. 그렇게 하염없이 울고 있는 자기를 대신해서 울어주고 있다고 너 울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 자기에게 편지 쓰고 있는 듯, 느꼈답니다. 또 다른 시집은 아니고 산문집인데요, 한문복 시인의 산문집입니다. “눈물은 왜 짠가” 입니다. 한문복 시인 하면 모든 “경계는 꽃이 핀다” 라는 시집으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이분이 자기의 대표적인 시 가운데 하나인 “눈물은 왜 짠가” 라는 시를 들어서 그 시 제목을 가지고 산문집 하나를 썼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주 짧은 시 한편이 나오는데, “성선설” 이라는 시가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 손가락이 열 개지요. 왜 열 개인지 아십니까? 저는 잘 몰랐어요 이런 뜻이 있는지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뱃속에서 몇 달 이나 있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 이거 아셨어요? 전 잘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요,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이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칠삭둥이는요? 팔삭둥이는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저 좋은 이야기 라고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금 해드리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면,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어쩌면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려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손 가락이 열 개인 것은, 그냥 열 개지 뭐’ 이건 이성적인 판단입니다.
그런데 열 개를 바라보는 그 손가락, 손가락이 열 개여!
태아의 감사의 몸짓이라고 -----
한 달, 두 달, 세 달, 네 달, 세어보며----
엄마 뱃속에서 몇 달이나 있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몸짓이라고 ---
이렇게 한번 느껴보는 것입니다. 나무를 바라보고 ‘그저 나무지’ 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나무를 살아 있다라고 한번 느껴보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했던 시인 가운데,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한참 전에 돌아가셨는데, 기독교 시인이셨고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분이셨던 박두진 선생님이지요. 이 분 살아 계셨을 때 그렇게 종종 이야기 하셨답니다. 지인들이 와서 물어봅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한번도 심심한 적 없으셨습니까?”
이 선생님이 뭐라고 이야기 하셨는가 하면 문만 열고 나가보랍니다.
문만 열고 나가보면 하늘에 떠가는 구름 자기에게 이야기를 하고 간답니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자기에게 먼 나라 이야기 들려주고 간답니다.
멋있게 보이시지요? 그런데 이거요 정신병리학적으로 이야기하면 환청에 시달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분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분이 하루는 저녁에 주무시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거실에서 너무 시끄럽드래요.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하느냐?” 하시며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가셨대요. 조용히 좀 하라고, 그랬더니 보니까, 이 분께서 수석(水石)을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수석에 대한 시도 많이 쓰셨는데, 거실에 이 분이 수석을 모아놓았는데 수석들이 다 저 잘랐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더래요. 그래서 꽥 소리를 지르고요, 조용히 하라고, 그리고 한 녀석씩 말을 시키셨대요.
“네가 하고 싶은 얘기 해봐, 그 다음 너 해봐, 너 끼어들지 마, 너 얘기 해봐!”
하나씩 하나씩 다 얘기를 시키신 다음에 조용히 하게 한 다음에 주무실 수가 있으셨대요.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들을 수 있을까?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

최근에 암에 걸리셔서 걱정이 되는 시인 가운데 이해인 수녀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산문집 하나를 썼는데 “향기로 말하는 꽃처럼” 이라는 산문집을 썼습니다. 이 산문집의 모토가 되었던 어떤 경험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
수녀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이름 모를 들꽃이 자기에게 향기로 자기에게 말을 걸더라는 것입니다. 몇 날을 모른 채 하고 걸어갔는데 더는 모른 체 할 수 없어서 어느 날은 그 향기로 말을 거는 꽃에게 조로로 달려가 가지고 거기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꽃과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아, 이것도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시인들의 이런 대단한 느낌, 이건 ‘누림’이지요. 이 누림을 바라보면서 제가 느끼게 된 게 뭔 줄 아십니까? 기독교인들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보이세요? 하나님 보셨습니까?
눈 앞에 딱 등장하셔서, “너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이야기 하십디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하나님 봤다고요, 하나님을 느꼈다고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살아가며 하나님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들리지 않지만 들은 듯 살아가는 신앙, 보이지 않지만 보인 듯 살아가는 신앙, 이게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소명을 주셨던 것은 아닐 런지요. 그저 밟아버리라고, 잊어버리라고, 활용해 버리고 사용해 버리고 없애 버리라고 그리고 정복해 버리라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셨던 것이 아니라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 이 말씀을 누린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 런지요? 한번 누려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땅을 누려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바람을 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들을 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죄악에 빠진 나 같은 존재를 누릴 수 있을까요? 한번 느껴보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이르셨다고요, 힘드시다고요, 그것들을 우리는 주로 없애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보다 조금 더 고통스러운, 조금 더 어려운 방법 하나를 제안 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 앞에 한번 그냥 그대로 서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느껴 보시는 것입니다.
굳이 억지로 어려운 일이 왔다고 하나님 뜻이 무엇일까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저 그 앞에 그냥 한번 느껴보는 겁니다. 바라보고 서 있어보는 것입니다. 한번 내 안에 충만케 해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단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 가운데에는 그저 평범하고 좋은 사람들보다는 어렵다, 힘들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상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겠다고 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물론 뇌 과학자들이나 여러 의학 분야에서는 이것을 뇌 기능의 문제, 풩셔닝의 문제 라고 이야기 하든지 아니면 어떤 신경전달 물질의 과다분비나 과소분비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정신 역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저는 원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어떤 사람들이 저를 찾아오는가 하면, 우울합니다, 불안합니다, 공포에 휩싸여있습니다. 길을 걸어 가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이어오는 어떤 이상야릇한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공황이거든요, 이런 것들을 느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있다가, 혹은 지하철 역에 갔다가, 백화점 한 가운데 갔다가 죽을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들을 갖고 옵니다. 그리고 맥이 빨리 뜁니다. 호흡이 가빠집니다. 무기력증에 시달립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불안하고 어렵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며 좋겠다 라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하기 보다 한번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번 그렇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누리기에는 참으로 완악한 세상일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쟁의 소식이 그득합니다. 생각해보면 경제가 어렵습니다. 연쇄 살인범이 날칩니다. 날뜁니다. 생각해보면, 이 사회가, 경제가 문화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누린다’ 라는 것, 하나님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게 천국 같지 않거든요.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떻게 아름답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야기 하지만 결단코 이 사랑의 말조차도 쉽게 나오질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습니다, 고백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고백하기란 참으로 어렵게 여겨집니다. 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걸 누릴 수 있다고요? 아니요, 어렵게 여겨집니다. 힘들게 여겨집니다.
그런데도 한번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내 아이들도 한번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보이기에는 참으로 연약한 것 투성이입니다. 모자라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한번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한번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누릴 수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서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언제 누릴 수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라는 믿음을 가질 때입니다. 그러면 누릴 수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이 시집 한 권을 썼는데 “흔들리지 않고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라는 시집입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시 입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있는데요 읽어드릴 게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듯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좋으시지요? 좋으면 한번 더 읽어야 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듯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걸 한번 누려보는 것입니다. 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쉽지 않고 녹녹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번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누려보자라고 하는 말씀의 두 번째 말씀은 빌립보서 4장 11절로 13절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외우고 다니는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인지 아시지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이 말씀 앞 절과 그 앞 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11절에서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살아가면서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족’이라는 단어요 영어단어로는 셀프릴라이언스(self reliance)입니다. ‘rely’ 기댄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자족은 ‘스스로에게 자기에게 기대기’ 라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기대기 라는 말을 하면서, 12절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아십니까?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게 되었다. 나는 배고픔에 처할 줄도 알게 되었다, 나는 배부름에 처할 줄도 알게 되었다. 나는 풍족하게도 되었고 없이도 살아보았다. 그러면서 삶의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걸 자족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가난합니다. 가난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주눅들어 합니다. 스스로에 대하여 자신감 없어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아가며 그저 움추러 갑니다.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가난하면 뭐 어때서요?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역사하시고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누리며 한번 살아가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난에 멈추어 사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할 수 있으시면 보다 더 부하게 사시려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그런데 그러다가도 되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 스스로에 대하여 너무 가슴 아파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한번 살아가 보는 겁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한번 살아가보는 것입니다.
그리고요 부하면 사람들은 웃줄 해합니다. 교만해 합니다. 아니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부하다고요, 그렇다면 그 부한 것들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오른 방향으로 선한 방향으로 사셔야 합니다. 이게 누리는 것입니다. 그게 당당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웃줄 해지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겸허하게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부를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에도 처할 줄 알고 부하게도 처할 줄 아는 그런 비결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게 ‘자족’ 이라는 겁니다.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대하여 당당하고 떳떳하게 누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압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요, 하나님 앞에서 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리의 기도의 모습은 누림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습은 자유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Let everything be a life.  Let it be a life” 그것을 내 안에서 살아 있게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살아있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죽었다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내 남편 죽었다 여기지 않고요 내 아이 죽었다 여기지 않고 내 아내 죽었다 여기지 않는 겁니다. 설령 내 마음에 옳게 여겨지지 않는 그런 일들을 한다 할지라도, 내 말 죽었다 깨나도 안 듣는다 할지라도 그래도 한번 살아있게 해 보는 것입니다. 살아있게 해보자는 겁니다. 살아있게 해보면 자유를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세리는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전에, 이렇게 고백하기 이전에 삶은 ‘스스로가 살았다’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주장하며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순간, 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얻게 것입니다. 누리게 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나를 이끌어 가고 계셨던 거로구나”

삶의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경직 목사님 하면 우리 교단은 물론 다른 교단에서도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다, 훌륭한 어른이셨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이 어르신이 생각해보면 종교계에 노벨상이라고 이야기하는 템플턴 상을 수상하실 때, 가장 명예로운 자리 아닙니까?
연세가 드실수록 명예를 추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돈도 이성도 다 멀어지고요 이젠 명예입니다. 왠 줄 아십니까? 자기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잘 살았다’ 이야기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명예를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예로운 자리에서 이 분이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죄인이라고요.
이 상을 받아 누리기에 마땅치 안타고요, 나는 신사 참배를 한 사람이라고요.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 한 사람이라고요. 어떻게 내가 이런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이런 고백은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참 자유롭게 할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어르신은 참 자유롭게 사셨습니다.
저는 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찬양을 할 때 그렇게 찬양을 합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제가 어디에 액센트를 두셨는지 아시지요. 다 뒷부분에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약한 것들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가난한 것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눈 멀었다는 것을 부정하고자 합니다. 그러데요 사실은 어디에 우리의 중점을 더 두어야 되는 줄 아십니까? 바로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여전히 가난하게 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건강치 못하게 하실는지도 모르겠고요, 여전히 볼 수 없게 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본다 라고 애기하는 게 아닌 거 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부하다 라고 이야기 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건강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고백할 줄 아는 방법을 알게 됐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눈물 나는 일입니다.
절로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입에는 한숨이 가득할는지도 모르겠고, 가슴에는 큰 돌덩이 하나 있는 양 답답함을 느낄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찬송해야 합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자유를 이야기 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렇게 고요하게 그렇게 한번 누리며, 이 세상 바라보며 모든 것들을 내 안에 살아있게 하며, 한번 살아있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애절하지만 힘들지만 살아있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살아있게 해보며 2월 한달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우리 주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 ?
    정철웅 2009.02.16 11:05
    참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그 상황을 누리며 자족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나가는 능력 청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
    안종혁 2009.02.17 13:53
    눈물이 나려고 할만큼 제 마음을 치는 말씀이군요.
    주님의 마음을 길어내신 깊은 말씀은 우리의 삶을 정말
    바꾸어 버리겠지요...
    다니엘 공동체에서 이런 말씀이 더욱 풍성히
    나누어진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귀한 말씀 자꾸 올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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